어른이 되어가면서 배우는 것은,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스무살 때 나는 지방에 있는 대학을 가게 되었고, 서울에서 학교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 커다란 열등감을 가졌었다. 오랜 여행을 다녀온 후 3학년 2학기에 나는 편입을 결심했다.
약 2년 동안의 시간 동안 나는 내 스스로의 열등감에 자의적으로 갖혀서 살았다. 사람들을 가까이 두지 않고 동네에 아무도 오지 않는 작은 공부방에서 2년을 갖혀 영어 공부를 했다.
결국 내가 꿈에 그리던 학교와 학과에 합격했지만, 그 이후로 약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꺾이지 않는 강한 후유증과 번아웃을 경험해야만 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인셉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 코브는 사람의 꿈 속에서 타겟의 기억을 조작하거나 생각을 훔치는 전문 조작범(?)이다. 타국에서 '망명' 중인 그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고, 타겟에 생각을 심는 '인셉션'을 시도한다.
세상에서 가장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순식간이고 그 순간들은 찰나이며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는 편입을 준비한 2년 동안 나라는 사람을 '열등감에 찬, 아직은 부족하고 발전이 필요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편입'에 성공해야 내가 완성되었으며, 불완전한 인간임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았다.
그렇다면 그 성공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글쎄, 생각해보지 않았다.
편입을 고려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바늘구멍'에 비유되는 시험으로 노력만으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내가 2년 동안 느낀 감정의 굴레는 하나였다.
'무기력함.'
나에 대한 인식과 그 때 갇힌 감정의 굴레는 편입이 끝난 26살부터, 28살의 봄까지 영향을 나에게 줬다.
다행히 지금은 그 때의 나와 거의 완전히 작별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 번 더, 그런 오기에 갖히려고 했다.
편입의 성공은 달콤했으며,
결과를 중요시하는 나는 다시 한 번 26살부터 28살까지의 나의 생각의 고착을 잊을 뻔 했다.
나는 나만의 드라마를 쓰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오기로 가득차, 나의 나레이션이 가득한 다큐이든, 드라마 비슷한 것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난 이제 그러한 미련한 감정이 어떠한 결과를 맛본 후에, 얼마나 맥빠지게 만드는지를 안다.
나는 그저 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람이 중심이 아닌 현재 두 발로 스스로 땅에 서 있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공기를 마시고, 서울의 하늘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집과 건강한 두 다리, 정신에 대해 감사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오늘의 업무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무리 한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다는 사실이 나의 '중심'에는 영향을 줄 수 없다.
나는 나로서 온전하며, 삶이란 것은 축복이다.
나든 너든, 항상 두 다리와 정신은 건강할 수 없을 것이며 시간은 가고 기회는 적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기를 마시고 즐겁거나 슬퍼할 수 있는 몸체와 정신은 오롯이 나의 것이며
이것이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촉감과 맛과 향기와 소리와 하늘의 색깔을 볼 수 있는 것,
그것을 내가 일정 시간 동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